컴퓨터로 글자를 대신 쓰는 시대에도 나는 여전히 글씨 모양에 대해서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악필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점점 글씨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일이 많아지자 필기체를 교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초등학교 다닐 적에 아버지께서 펜글씨교본 따위를 이용해 강제로 필체를 교정해주시려 했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동네에서 가장 잘 나가는 악동인 것은 잊으셨다. 그 책은 깨끗한 상태 그대로 내 책장에 지금도 꽂혀 있다.


서점에서 펜글씨교본 개정판을 사게 된 것은 군 복무 중 휴가 때의 일이었다. 진중문고에 있는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무렵 불현듯 생각이 났다. 게다가 당시에는 보내든 보내지 않든 매일 한 통씩 편지를 썼던 시기였다. 이왕 보낼 거면 좋은 글씨로 보내고 싶었다. 책에 쓰여 있는 글씨의 모양과 분량, 예시문 등을 고려하며 고르는 데만도 한참이나 걸렸다.


부대에 복귀하고 나서 책을 펼쳐보니 속지는 공책이라고 할 정도로 빈칸이 많았다. 펜글씨교본이란 원래 다 그런 것인 줄 알면서도 속에서는 자연스레 한숨이 올라왔다. 단기간에 끝내겠다는 욕심은 이미 서점에서 버리고 온 게 도움이 됐다. 복귀하고 나서 며칠 뒤부터 하루에 대략 스무 자 정도를 열 번씩 썼던 것 같다. 첫째 날이 지난 다음부터는 전날에 연습했던 글자도 마음 내키는 대로 몇 십 번씩 써 보기도 했다. 빠듯한 연등 시간 속에서도 긴급 근무 지원 같은 일들이 찾아와 나를 괴롭혔으나 혹여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더라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군대 안에 있을 날은 영겁처럼 많이 남아 있었다.


글자 연습과 단문장 연습이 끝나고 나서도 나는 아직 군인이었다. 그렇지만 긴 문장은 전부 연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귀찮기도 했고 어느 정도 자신감도 붙었다. 가끔이지만 글씨 잘 쓴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그래봤자 한계는 있었다. 원래부터 글을 쓸 때 수평을 잘 맞추지 못 했기에 문장을 길게 쓰면 글씨가 각자 따로 놀아 조잡한 티가 나는 데다 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제대 이후에 곧바로 복학을 하면서 공책에 필기할 기회가 많아졌다. 정자로 필기하자니 수업 내용을 따라가기 힘들어서 글자는 다시 종이 밖으로 이륙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필기체가 전보다는 확연히 나아진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군 제대 이후 1년 정도 지났을 때 휴대전화로 찍었던 사진이다. 과제 양이 많아서 친구들에게 이 수업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의미에서 사진을 올렸는데 글씨 잘 쓴다는 평을 들어서 기뻤다. 생각해보면 잘 썼다기보다는 전보다 가독성이 좋아졌다. 지금은 뭐 다시 개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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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_클로버
무색의 녹색 생각들이 맹렬하게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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