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매 전 예고 영상의 마지막 말인 '전쟁에서 모두가 군인은 아니다', 라는 의미심장한 대사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이 게임의 목적은 전쟁에서 생존하는 것이다. 처음에 군인들 나올 때 그래픽이 꽤나 괜찮아서 재미있는 슈팅 액션 게임일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완전히 빗나갔다. 여기서도 전쟁을 소재로 하고는 있지만 주체는 기존과 전혀 다른 민간인. 물론 슈팅 게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비참하다. 그러나 탈영병 로만이 있다면 갑자기 게임 장르가 바뀌는 게 함정. 생존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라니, 게임이 통째로 실존주의 작품이다. 아래는 본격 게임 트레일러.
2D 같지만 배경과 캐릭터는 전부 3D로 구현되어 있다. 광원 효과도 수준급으로, 캐릭터나 오브젝트들을 큰 모습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하다. 잘 만들어 놨는데 가까이서 사진을 못 찍잖아.
위의 사진이 원본 로고 화면이고 아래가 비공식 유저 한국어화(한글화) 버전.
군데군데 오역이나 오자가 좀 있지만 게임 플레이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다. 게임이 2014년 11월 14일에 나왔는데 한국어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2015년 1월에 나온데다가 아마추어 팀이 제작한 것치고는 완성도가 높은 편이니 그저 찬양 뿐. 개발사인 11bit가 예전에 한국어화를 했던 적이 있긴 했다. 그러나 이전 작인 《어노말리 코리아》 ANOMALY KOREA는 모바일 디펜스 게임인데다가 번역 수준이 기계 번역 수준이라 한국어판 정식 발매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다.
게임을 시작하면 나오는 프롤로그.
FPS에서 구현되지는 않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핵심은 보급이다. 음식과 약, 잠잘 곳, 무기 등 보급이 없다면 군인의 전투력은 매우 낮아진다. 의료선 없는 해병의 생존률을 생각해보자. 삼국지나 현대전이나 보급로를 확보하고 유지하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전쟁은 진다. 군인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대부분은 작전 기일이 있고, 목적지와 후퇴할 곳이 있는데다 강력한 약탈 수단인 총이 있다. 그러나 민간인은 다르다. 살인 방법을 훈련 받지도 못 했고 후퇴할 곳도 없는데다 전쟁이 언제 끝날 지도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전쟁에서 지는 쪽은 항상 민간인이다.
석 달 후 아사자와 동사자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버려진 집에서 모든 문, 창문 틀을 벗겨서 태웠다. 나는 내 가구를 전부 난방에 소모했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죽었는데, 대부분 물이 나빠서였다. 내 가족 중 두 명도 그렇게 죽었다. 우리는 빗물을 받아 마셨으며, 비둘기를 여러 번 잡아 먹었고, 한 번은 쥐도 먹었다.
위와 같이 이후 계속 인용될 증언담은 보스니아 내전 당시 생존자가 남긴 글이다. 참고 링크1참고 링크2
개발진은 게임을 만들 때 보스니아 내전 때(1992~95) 포위된 사라예보 등 현대 시가전에 관한 자료를 참조했다고 밝혔다. 정말 플레이해 보면, 시스템적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적이다. 난로에 장작을 넣어 불을 때지 않으면 추위에 시달려 질병에 걸리니 나무를 구해야 한다. 나무를 구할 수가 없다면? 그럼 집 안에 있는 가구에 도끼질을 해서 장작을 만드는 수밖에. 그러나 가구도 이미 다 장작으로 써 버렸다면 이제부터는 선택을 해야 한다. 사람은 많은데 자원이 없다면 비명과 핏물만 있을 뿐.
그런 상황에 처하면 많은 것이 바뀌고,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괴물로 변했다. 끔찍했다. (중략) 당신이 스스로 얼마나 살아 남을 수 있느냐는 얼마나 나아가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뭔가 추한 행동을 하기 위해 준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게임은 상황만 던져 놓고 선택을 플레이어에게 일임한다. 식량을 구하지 못해 아사하기 직전인 상황에서 플레이어는 식량이 있는 장소를 알게 되었다. 빠루 한 자루를 들고 찾아간 곳은 맹인 노부부가 조용히 살고 있는 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앞도 못 보는 할아버지가 계속 쫓아다니며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내가 아사를 면하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가 아사해도 괜찮은 것인가?
일정 시간이 지난 뒤 내가 아는 바로는, 사람들은 강도에 죽기보다는 위생 문제로 질병에 걸려 죽는 비율이 더 많았다. (중략) 흔한 부상은 당연히 총상에 의한 것이고, 전문가와 물자가 없는 상황에서 의사를 찾아야 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면 그가 살 확률은 잘해야 30% 정도일까.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죽었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상처의 감염에 의해 죽었다. (중략) 정말 사소한 것이 사람을 죽인다. 설사조차도 의료와 물 섭취가 없으면 며칠 내로 죽는다. 특히 작은 아이들이 심하다. 피부진균 감염, 그리고 식중독으로도 많이 죽었다. 우리는 손쓸 방법이 별로 없었다. 기본적으로 상처는 동네에서 구할 수 있는 허브만을 처방할 수 있었으며, 상처를 입으면 '라키아'와 같은 도수 높은 술로 상처를 소독하고 어디서든지 항생제를 구하려 애쓰는 수 밖에 없었다.
게임의 후반부로 치닫을수록 플레이어가 양심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플레이어는 주인이 없는 물건을 줍고 거래하면서 선량한 방식으로 생명을 이어나고 있었지만 약탈꾼들이 집을 털러 온 까닭에 부상을 입는다. 붕대와 약품을 구하러 다른 곳을 찾아보지만 이미 국지전까지 발발해서 그나마 약을 얻을 수 있는 지역은 이제 단 한 곳 뿐. 그곳에는 아픈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약을 가지고 있는 어떤 아들의 집이다. 가지고 있는 물건은 칼과 약간의 식량 뿐인데 그것만 가지고는 붕대와 약을 교환해주지 않는다는 말을 상대에게 들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상황 속에서 종종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된다. 우리 모두는 그런 결단을 거쳐왔으며, 좋고 나쁜 것이 서로 혼재되어 있음을 납득해왔다. 물론 확실히 말해두지만, 나는 다른 사람을 강도질한 적도, 식량 등을 뺏으려 살인한 적도 없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기도 하다. 나는 항상 그런 것을 찾으려 애써왔지만, 항상 어려운 길이었다. (중략) 당신이 만약 그 상황에 처했을 때 가족을 보호하고 먹여 살리기 위해 무슨 짓까지 해야 할지 결코 알지 못 할 것이다. (중략) 이 문제를 너무 개인적으로 파고들지 말기 바란다. 당신의 주의주장이 정상적이고 고결한 것을 알고 있으며, 나 또한 공감한다. 그저 좋은 사람들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나쁜 일을 해야만 할 수도 있다는 사실만 마음에 담아 둬라. 이것이 그들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까? 글쎄, 어쩌면. 당시에 좋고 나쁨은 굉장히 혼재돼있었다. 말했듯이, 우리 모두는 선택해야만 했다.
여러가지 암울한 배경과 함께 눈길을 끄는 이야기들이 게임 내 이벤트로 잘 구현되어 있는 편이다. 3~4일에 한 번씩 물물거래를 원하는 장돌뱅이가 찾아오기도 하고 이웃이 찾아오기도 한다. 내용은 다양하다. 건물 더미에 깔린 사람을 구조해주거나 아픈 엄마를 위해 약을 구하러 다니는 아이들에게 약을 지원해 줄 수 있는데,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선한 행동을 하면 엔딩 크레딧에 좋은 내용으로 올라가기는 하지만 상황이 안 좋을 때 선한 행동을 하면 엔딩 자체를 못 볼 수도 있으니 선택은 언제나 신중하게.
그런 스토리텔링을 제외하고 개인적으로 감탄했던 부분이라고 하면 의외로 전투 장면이다. 야간에 물건들을 수집하기 위해 돌아다닐 수 있는 인원은 한 명 뿐인데다 주인공 보정도 없어서 생명력도 적과 동일하다. 사실 방탄복과 방탄 헬멧이 없다면 더욱 약하다. 그렇다면 적에게 들키지 않고 잠입하여 물건을 담아오는 수밖에 없다. 나는 잠입 액션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이번 게임에 만족한 이유는, 해가 뜨기 전까지 수집을 마치고 돌아와야만 하는 시간 제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임 난이도도 이에 맞게 적절하게 설정되어 있다. 즉 그다지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잠입 플레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델타 포스나 MGS를 하면서 장시간 대기를 하다 보면 내가 컴퓨터에게 지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공격적인 암살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것도 칼 한 방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일명 '스텔스 킬'이 가능한 인물이 구성원에 포함되어 있을 경우에나 가능하다. 그런 인물들이 없다면? 총으로 무장을 하거나 도둑처럼 락픽 가지고 다니면서 조용히 훔쳐야지 뭐.
이런 류의 게임을 거의 해본 적이 없는데, 해보고 난 뒤 재미있었던 동시에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더욱이 대한민국은 휴전국인데.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도 밤낮없이 근무하느라 고생하시는 국군 장병 여러분 나도 갔다왔으니까 힘내시길. 마지막으로 보스니아 내전의 생존자의 글을 남긴다. 야밤에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니 상황이 터졌을 때 어찌될지는 글쎄.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가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당신은 사람을 빠르게, 별로 고뇌하지 않고 죽일 수 있는가? 맨손이나 나이프로? 다시 한 번 물어보자. 할 수 있나? 내 생각에, 죽이거나 혹은 위협 받는 상황에 처하지 않는 한 당신은 정답을 알 수 없다. 장탄된 총을 가지고 공격자를 겨누었는데도 나이프를 든 공격자에게 찔려 죽을 때까지 뻣뻣이 굳어있던 어떤 남자를 본 적이 있다. 추측컨데 그는 쏠 용기가 없거나, 그 상황 내내 마비되어 있었던 것 같다. 현재 상황을 받아들여야하는 첫 주가 가장 힘든 때였지만, 곧 당신은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며 또한 그러는 편이 당신에게 좋다. 사태가 터지자 비명을 지르며 혼돈에 빠진 사람도 봤다. 벽을 빤히 노려보며, 그냥 상황을 인식하려 하지 않더라. 같은 시기 다른 남자들은 버려진 경찰서에서 무기를 훔치고 있더군. 어느 쪽이 생존에 적합한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