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임 《스탠리 패러블》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게임을 플레이하실 분들은 읽지 마시길.


"그래 결심했어!" 라는 이휘재의 대사로 유명한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 중 하나인 〈TV인생극장〉은 선택이라는 개념을 중심 소재로 이끌어 화제를 모았던 프로그램이다. 영상을 보면, 당시에는 몰랐는데 엄청난 스타들이 나온다.



테마 음악이 정말 기억에 남는다. 그 곡은 보니 M 그룹의 Felicidad라는 곡을 TV인생극장에서 샘플링한 것. 슈프림팀이 Supermagic으로 샘플링을 하기도 한 그 곡 맞다.



텔레비전 방송은 단방향이기 때문에 관객이 극에 참여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TV인생극장〉에서도 그러한 약점 때문에 선택은 단 한 번으로 제한되고 그 이야기 양상은 두 가지로만 나뉜다. ARS 전화로 시청자들이 선택하게 했으면 슈스케 저리가라였을 텐데.

그러나 게임은 다르다. 관객은 실시간으로 극에 참여할 수 있다. 유저는 NPC들과는 다른 독립성을 부여받으며 자신이 속한 세계를 바꿔나간다. 이인화 교수는 이를 '디지털 스토리텔링'으로 정의하고 있다. 현재는 자유도라는 척도가 유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데, 현재 설명하는 개념과 유사하다.


《GTA》시리즈가 자유도 높은 게임의 시효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조작이나 도덕적 규범에서의 자유도이고, 자유도가 정말 높은 게임들은 《엘더스크롤》시리즈나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와 같은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선 정말 말 그대로 엔딩을 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강의 중 "철학 책을 안 읽어도 되니 토먼트를 꼭 해봐라."라고 했다고 카더라


예를 들어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에서 플레이어는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 동료를 제물로 바칠 수도 있고 자신의 최대 HP를 제물로 줄 수도 있다. 물론 《더 길드 2》와 같이 약초 장사로 돈을 벌기 위해 우물에 독을 넣을 수도 있다(...) 독 넣다가 잘못해서 흑사병이 도지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그러나 요새 게임은 이런 근원적인 장점을 역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블록버스터 게임으로 불리는 《콜 오브 듀티》 시리즈는 말할 것도 없고, 창의적이라고 불린 《히트맨》도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적어져만 갔다. 게임성이나 표현력에만 집중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게 어쨌든간 유저는 그저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화살표 대로만 따라가면 엔딩을 볼 수 있게 됐다. 그러니 우리 모두 다크 소울을 합시다(...)


리그베다 위키에서는 THIS IS DARK SOULS!!!이라면서 개드립 시전 중... 다크 소울 시리즈는 내비게이션도 없고 퀘스트에 대한 힌트도 거의 주지 않는 불친절한 게임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그에 따라 창의적인 플레이가 가능하다고 쓰고 강요된다고 읽는다.


이런 세태를 《스탠리 패러블》은 꼬집고 있다. 얼굴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알려주는 대로 키보드 자판만 누르던 스탠리가 주인공인데 그에게 내레이터(Narrator)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플레이어는 그가 말하는 대로 스탠리를 조종할 수도 있고, 아니면 청개구리짓을 할 수도 있다. 이때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내레이터는 플레이어의 존재를 눈치채기도 한다. 또한 플레이어는 스탠리를 움직이면서 내레이터에게 온갖 핀잔을 듣는데 이때 스탠리의 존재 이유와 의문으로 가득 찬 게임 구조에 대해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런 생각들이 모이게 되면 플레이어는 게임 플레이와 그 구조 자체에 대해 의심하여 몰입에서 빠져나와 거리두기를 시행한다. 그야말로 메타픽션의 결정체.



복도를 따라 걸어갔더니 문 두 개가 나오는 건 애교 수준에 불과하다. 플레이어는 왼쪽 문 혹은 오른쪽 문과 같은 단순한 선택만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택을 거부하고 시작 지점에서 머무를 수도 있으며, 아니면 내레이션 대로 가다가 내레이터가 원하는 엔딩에 도달할 수도 있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자살도 하나의 선택이며 주어진 선택에서 벗어나 새로운 선택을 시도하는 것도 가능하다. 더 자세히 말하면 재미없을 테니 여기까지만.


또한 《스탠리 패러블》은 모니터 앞에 앉아 마우스와 키보드를 조작하는 플레이어들에 대한 일침을 날리기도 한다. 게임 플레이어들을 버튼만 누르는 기계로 묘사하며 별다른 서사성 없이 조작과 논리적 사고로만 게임을 진행하게 되는 게임 《포탈》과 《마인크래프트》에 대한 조롱까지 잊지 않는다.


물론 '디지털 스토리텔링'이라고 불리면서 자유도의 보고로 인식되는 게임도 약점은 존재한다. 유저의 모든 창조적인 디지털 놀음도 결과적으로는 프로그래머가 디자인한 세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단 하나 예외적인 것이 있다면 '버그'다. 이것을 행한 유저는 프로그래머가 정의한 세계를 벗어나며 자유롭게 활동한다. 뭐 물론 그것이 아름다운 결과로만 나오지는 않지만...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와 스미스 요원이 버그로 인식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놀랍게도 《스탠리 패러블》제작진들은 플레이어가 행할 수많은 결과를 거의 모두 예측하여 엔딩을 만들어 놓았으며 플레이어가 명령자(게임 구조 혹은 내레이터) - 수행자(주인공 혹은 플레이어)의 관계를 거부하고 붕괴하려는 시도를 했을 때 게임 자체가 망가져가는 모습까지 재현해 놓았다.


그러나 플레이어의 행동 결과에 따른 이벤트가 모두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플레이어 역시 제작자의 손바닥 안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스탠리 패러블》은 이 역시 놓치지 않고 게임에서 내레이터의 말을 빌려 언급하는데 이로써 자기 게임을 하고 있는 플레이어까지 화살을 들이댄다.


《스탠리 패러블》이 컬트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말하는, '게임 플레이어들은 버튼만 누르는 기계'라는 명제가 항상 옳기만 한 것은 아니다. 조작이라는 유희적인 행위 역시 게임에서는 중요한 요소이고 《스탠리 패러블》 자체도 그들이 언급하고 있는 플랫폼을 그대로 이용하고 그 플랫폼 안에서만 제한적으로 메시지를 출력할 뿐이다. 음, 그것만으로도 소격효과를 이루내니까 대단한 건가(...) 그 구조에 대해 내레이터의 말을 빌려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부분에서는 조금 유치한 점도 있었다.


지금 《스탠리 패러블》은 HD 버전이 나와있다. 나는 그 전에 나왔던 버전(데모 버전이었나)을 먼저 해봤는데, HD편과 내용이 조금 다르다. 하려는 얘기는 비슷하긴 하니 별 상관 없나. 참고로 한국어 패치를 하면 사장실에서 내레이터가 말을 고르며 헛기침을 할 때 자막 쪽에서 버그가 나서 게임이 튕기는 사고가 발생한다. 자막을 끄든지 잠깐 영어로 플레이하면 된다.


도전 과제가 참 특이한 게임이기도 하다. 게임을 하지 말라는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5년 동안 플레이하지 않기라든가 화요일 24시간 하루종일 게임을 하라고 하는 도전 과제도 있다.


이야기가 매우 길어졌다. 근데 명작이니 얘기를 짧게 할 수가 없잖아. 《스탠리 패러블》은 게이머와 게임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게임이다. 주어진 선택을 의심하며 게임 속 아바타에서 탈피하여 의자에 앉아 있는 지성체로 돌아오도록 의도한 게임은 내 삶에서 처음이었다. 게임할 때 일부러 여러가지 찾아보고 주어진 시나리오를 거부하며 버그 플레이를 많이 시도하는 플레이어들에게 강력 추천한다.


WRITTEN BY
_클로버
무색의 녹색 생각들이 맹렬하게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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