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파프리카 Paprika》(2007) 리뷰.



입술 표현이 참 매력적이다.



이 애니메이션 영화를 처음 접하게 된 시기는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못 쓰는 컴퓨터를 수리했을 때 하드에 들어 있던 화질 낮은 영화 파일 중 하나가 바로 이 작품. 자막도 없고 화질도 나빠서 당시에는 차분히 감상할 생각을 못하고 야한 장면이 없나 뒤지기만 하다가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러다 군대도 갔다오고 시간이 꽤 지난 지금 갑자기 생각났다.


《파프리카》는 《퍼펙트 블루》, 《천년여우》, 《도쿄 갓파더즈》등으로 유명한 콘 사토시 감독의 작품으로 베니스 국제영화제 경쟁부분에 진출한 내역이 있다. 원작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로 국내에서 명성을 얻은 츠츠이 야스타카의 동명 소설. 꿈을 소재로 다루었는데 이후 크리스토퍼 놀런의 《인셉션》에서 재현된 장면들이 나와서 재조명을 받기도 했다. 호텔에서 범인과 대치하는 장면이나, 층마다 다른 꿈들을 엘리베이터로 탐방하는 장면 같은 경우는 정말 내가 봐도 비슷하다. 《레퀴엠 Requiem for a Dream》이 《퍼펙트 블루》의 일부 장면을 오마주했다는데 이것도?



이야기는 주인공 '파프리카'가 꿈 속을 자유롭게 휘젓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DC 미니'라는 정신치료기구(꿈 감응장치)를 이용하면 상대의 꿈을 데이터화 하여 외부 장비로 관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이 그 사람의 꿈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꿈은 무의식의 세계이므로 과거 겪었던 사건에서 발생한 트라우마나 욕망이 분출된다는 프로이트나 융의 철학을 각본의 베이스로 삼은 셈인데, 요즘 심리학에서는 무의식의 개념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에 작품 내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과학적'이라는 키워드와는 시작부터 어긋나고 말았다. 뭐, 그런 것과는 관계 없이 파프리카는 단서를 찾아 꿈 속을 유영하며 환자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일종의 꿈 탐정으로 나온다. 문제는 개인의 꿈이 이어지는 상황 즉 일종의 시냅스 상황이 만들어지는데 그것을 어떤 나쁜 사람이 이용하려 한다는 것. 실제 형사인 '코가와'와 파프리카가 그걸 저지하는 내용이 이야기의 전체 흐름이다.


꿈을 공유한다는 것은 사실 《짱구(크레용 신짱)》가 원조라던데...


작품은 애니메이션의 이점을 잘 살린 신으로 가득하다.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개별 오브젝트의 디졸브 효과(파프리카가 다른 것으로 형상 변환을 하는 장면)라든지, 관객의 상상력과 암시에 힘입은 터무니 없는 스케일 변환이라든지 하는 재미난 요소들이 많다.


본격적으로 꿈과 현실이 모호해지기 시작하면서 프레임은 활발하고 유쾌한 것들로 가득찬다. 그러나 항상 웃는 것은 무표정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나쁜 일이다. 작중에서 DC 미니의 부작용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며 이상한 말을 내뱉는다. 현재 내 프로필 설명란을 채우고 있는 '무색의 녹색 생각들이 맹렬하게 잠든다.(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처럼 그들이 하는 말은 문법적으로 완벽하지만 의미는 모호한 문장뿐이다. 그들은 결국 정신병자처럼 행동하다 인지력과 주의력까지 잃어버려 사고를 당한다. 


시험 망쳤을 때 짤방으로 쓰기 좋지만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을 고려하면 섬뜩하다.


꿈에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다면 위험하다. 그런데 영화는 한 발짝 더 나아가 관객에게 화두를 던진다. 주인공 파프리카는 현실의 치바 아츠코에게서 나온 다른 자아이지만, 치바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


치바 아츠코 : 왜 내 말을 듣지 않지? 파프리카는 내 분신이잖아!

파프리카 : 아츠코가 내 분신이란 생각은 안 해 봤어?


...장자의 호접지몽이 순간 떠오를 정도로 날카로운 통찰력이 휙, 하고 지나가 버리긴 하지만 난 흘려 듣지 못하고 꽤나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제는 보드리야르 사상의 영화가 너무 많기는 하지만 아직도 이러는 것을 보니 나에게는 아직도 매력적인 모양이다. 그것 외에도 인상적인 대사는 많다. "억압된 의식을 표출한다는 의미에서는 인터넷과 꿈이 비슷한 것 같지 않나요?"의 대사도 그 중 하나. 이젠 식상할 정도지만 영화가 나올 당시를 고려해 본다면 꽤나 충격적이다.


주제에 대한 내용이 길어지기는 했으나 다른 부분이 별로였다는 것은 아니다.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빛을 이용한 연출 등이 돋보인다. 게일 챈들러의 책 《위대한 영화의 편집 문법》에 그 부분이 잠깐 등장한다. 심지어 작품 내에서 영화 기법을 직접 설명하기도 한다. 주인공 형사 코가와의 트라우마와 영화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서 등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영화가 시작할 때 나오는 파프리카의 등장 신에서 개인적으로 탄성을 내질렀는데, 서사적 연결이 완전히 붕괴된 꿈의 세계를 몽타주 기법으로 충실히 설명했기 때문이다. 꿈을 표현하는 방법은 이미 《인셉션》에서 경험하기는 했으나 그 전 시대에 나온 작품 주제에 전혀 뒤지지 않는 세련된 방법이기 때문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게다가 그 의미없는 장면들이 후반부에서 고스란히 의미가 부여된다면 어떨까. 정말 지루해질 틈이 없다.


콘 사토시 감독(1963-2010)은 47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오시이 마모루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주목받았던 감독인데, 그가 일찍 죽게 되어 아쉽다. 이번 작품을 보고 나서 다른 작품들까지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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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_클로버
무색의 녹색 생각들이 맹렬하게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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