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2006) 리뷰.


이렇게 귀여운 얼굴로 총을 쏘다니...


2001년은 '필수요소'의 시대였다. 중심지도 없이 산발적으로 생산된 인터넷 컨텐츠의 대부분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어떤 맥락도 없어서 유행어나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발생의 목격자가 되는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엽기'나 '개죽이' 따위를 이해한다고 해서 삶의 질이 나아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냥 그때는 그런 사소한 것에 그렇게 웃을 수 있었다.



《아치와 씨팍》은 그와 같은 인터넷 문화 속에서 출발했다. 우라늄은 커녕 인류의 탄생 이전부터 존재했던 나무 대신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자원은 인간의 대변이다. 효율이라든가 화학 처리 방법 같은 자세한 설정을 따지면 안 된다. 스타워즈처럼 세계관 설명을 해 줬으니 납득만 허가한다. 남은 연료는 인간에게서만 얻을 수 있으니 진행상 당연히 국가가 배변량을 검사하기 시작하고 배변에 성공한 사람에게 하드라는 마약을 지급한다. 하드는 말 그대로 막대형 아이스크림. 위의 짤을 보면 알겠지만 꼭 캔디바처럼 생겼다. 화장실만 갔다오면 마약을 얻을 수 있으니 자연스레 사람들은 마약에 의존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마약 의존 후유증에 의한 돌연변이가 생겨난다. 극 중에서는 보자기갱단의 일원들로 나오는데 이들은 몸이 파란색인데다 키도 작고 사고 능력도 조금 떨어지는 것으로 나온다. 이들은 배변과 생식 능력도 퇴화돼 버린데다가 살기 위해서는 하드를 먹어야 한다. 근데 이 하드를 국가가 직접 공급하다보니 화장실을 못 가는 돌연변이들은 결국 생존을 위해 국가에게 삥을 뜯어야할 판. 이렇게 보자기갱단이 테러를 감행하는 세계가 이 작품의 배경이다. 여기에 장 튼튼한 이쁜이가 오류로 화장실 갈 때마다 엄청난 양의 하드를 지급받게 되면서 그것을 이용하려는 아치와, 이쁜이에게 반한 씨팍을 둘러싼 이야기가 이 영화의 줄거리.


강압적인 국가와 그에 저항하는 반란군이라면 실패하지 않는 대서사시의 구조지만 여기서는 소위 '착한 놈'이라고 부를 인물이 없다. 그냥 다 나쁜 놈이다. 그것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다 나쁜 놈이라서 피카레스크 같지가 않다(...)


그런 선악 구도를 제외하면 내용은 전형적인데다 산만하고 더럽기까지 하지만 액션신은 꽤나 볼 만하다. 제작 기간이 8년으로, 엿가락처럼 길어져서 2006년에 개봉했지만 상황을 굳이 감안하지 않더라도 속도감이 있다. 2000년에 먼저 나온 플래시 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도 액션 하나는 먹어줬지. 개인적으로는 돌아온 이소룡 시리즈가 더 재밌었다.


영화와 비교하면 디테일은 처참하지만 성우 연기도 자연스럽고,

무엇보다 아치와 씨팍이 안 맞고 다른 애들 때리고 다니는 게 갸륵하다.


영화는 플래시 시리즈보다 세계관 설명도 잘 되어 있고 사건 간 나름의 개연성도 있다. 그래도 마약 신고 전화에 손이 가지만...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수많은 패러디가 등장한다는 것. 원본에 대한 풍자나 유머와 같이 부가적인 아우라가 말끔히 제거된 채 형태만 빌려오기 때문에 무표정한 패러디가 불리는 '패스티시(패스티쉬; Pastiche)'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우선 계단 전투 장면은 너무나 유명한 《전함 포템킨》에서 차용한 것 같다. 계단 중간에 평탄한 곳이 한 번 나오는 것에서 눈치챘다.후반부 광산 카트 전투 장면은 뭐 당연히 《인디아나 존스》고... 개코 형사의 대사 중 하나인 "죽든 살든 넌 나와 함께 간다."는 《로보캅》에서, 환각에 취한 상태의 아프로펌 지미가 의자에 앉는 장면은 《원초적 본능》을 노린 것. 이 외에도 북한 프로파간다 패러디 등 얘기하자면 정말 많다.


성우 얘기를 안 할 수 없는데, 류승범의 아치 성우 연기가 정말 기가 막혔다. 이름의 유래대로 양아치답게 시시껄렁한 목소리와 찰진 욕을 내뱉어 주는데 정말 이 역할에선 류승범을 대체할 사람이 없는 것 같다. 현영도 부족한 점 없이 하이톤을 잘 뽑아 줘서 괜찮았다. 특유의 음색 덕분에 이쁜이라는 캐릭터에게 개성이 부여된 듯. 임창정은 목소리가 조금 달라서 처음에는 임창정인지 잘 몰랐다. 욱 했을 때 빼고 연기는 그냥 그럭저럭. 신해철의 연기는 조금 부족했던 것 같다. 긴급한 상황에서도 별로 체감이 안 와서... 그렇지만 악당 역할에 정말 잘 어울렸다. 특히 자신의 곡 〈그대에게〉, 〈슬픈표정 하지 말아요〉, 〈재즈 카페〉의 가사를 읊조리며 이쁜이를 때리는 장면에서는 소름...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Singing in the Rain〉이 나왔던 장면을 패러디한 듯.


소소한 재미라면 《X-파일》에서 스컬리와 멀더 역할을 맡았던 서혜정, 이규화 콤비의 연기 대결. 성우는 잘 모르지만 목소리를 듣고 바로 알았다.



다 보고나니 시간은 잘 때웠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광들에게는 패러디를 발견하는 소소한 재미가 있었겠지만 서사적 완성도가 너무 아쉽다. 이러니 스토리를 수입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액션신이나 패러디 장치들을 뚝 떼다가 좋은 시나리오에 넣어 놨으면 불후의 명작이 되었을 텐데... 하긴 서사를 막 꼬아서 너무 어두운 이야기로만 간다면 그것대로 재미없었을 것 같기도 하고. 단선적인 이야기도 나름 매력이 있는 법. 특히나 이런 더러운 소재를 택했다면 서사적 완성도와 상관없이 대중성을 얻기는 매우 어려웠을 듯하다. 저제작비로 인해 셀 애니메이션의 강점도 많이 안 드러난다. 그야말로 쌈마이 액션. 그렇지만 사랑스럽다. 이렇게 개성적인 애니메이션은 오랜만이다. 개인적으로 일본이나 미국식 애니메이션과는 다르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보자기갱단 애들이 정말 사랑스럽다.


쌈마이해서 흥행에는 실패했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이 상을 좀 받아 해외에서는 인기가 좀 높다. 서울 국제 만화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것을 시작으로 스페인 시체스 영화제에서 최우수 애니메이션 상을 받기도 했다. 네덜란드를 비롯 프랑스, 미국, 호주 등의 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너희들도 좋아할 줄 알았어.


인터넷에서는 《뮬란》이나 《월-E》보다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출처가 불분명한 루머가 퍼진 적도 있으나 실제 해외 수입은 추정하건데 약 40억원 정도. 참고로 《월-E》는 이 애니메이션의 152배를 벌었다(...)


아 참. 19세 영화다. 유두 노출이 등장하긴 하지만 야하다기 보단 그냥 더럽다. 대변에 관한 이야기와 욕이 많이 나와서 19세인 듯. 어린이 친구들은 좀 참으세요.


WRITTEN BY
_클로버
무색의 녹색 생각들이 맹렬하게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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