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T WALK

보행자 신호등에서 녹색등을 봤던 기억은 있다. 적어도 사 주 전에는 그랬다.

컨실러를 바르는 일도, 부재중 응답기를 켜 놓는 일도, 신발을 신는 일도 죄다 어색하기만 했다.

집에서만 꼼짝도 않고 달걀이나 빵까지 인터넷으로 주문하게 된 이유는 다양하게 분명했다. 남자친구와는 브로크 업. 덩달아 밴드에서도 아웃. 홧김에 지른 신발과 옷의 매치 미스 등등. 창문에는 빛을 먹고 사는 꽃을 길게 길렀다. 하루 중 가장 참을 수 없는 시간은 이유도 잃은 채 혼자서 피임약을 삼킬 때였다. 볼런티어 클럽으로 만난 언니가 직접 아파트 앞에서 클랙슨을 울리기 전까지 우리집에 살아 있는 것은 없었다. 미리 전화를 했다면 아마 거절했을 것이다. 언니는 정말 한 시간 반을 기다려 줬다.

피아니스트는 꼭 필요해. 토미랑 친구들이 또 편지를 했다니까. '마미'라는데 가야지.

언니는 버스에게 양보를 하는 도중 고개도 돌리지 않고 불쑥 말을 꺼냈다. 나는 일부러 한 입 가득 커피를 머금었다.

물고기다!

언니의 매력적인 검은 손가락 끝은 건물 이 층을 가리켰다. 나는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앞으로 굽혔다.

그곳에는 웬 물고기 동상이 벽 모서리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언니는 휘파람을 불었다.

당장이라도 벽을 부수고 나갈 것만 같은데.

도시에서 가장 힘찬 금빛 움직임이 벽을 뚫는 중이었다. 나는 물고기와 눈이 마주쳤다.

WALK

횡단보도는 신호등이 바뀌자 수많은 종류의 다리들로 가득 찼다. 인파는 미끄러지듯 흑백의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다.

나도 손끝을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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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학교에서 인준하는 모든 활동이 다 그렇듯이 우리 학회도 마찬가지였다. 학회가 1년 동안 잘 유지되었는지 일종의 '생존신고'를 연말마다 해야 했다. 11월에 예정된 학술제에서 우리 학회는 이미지즘을 중심으로 발표하기로 했다. 학회에서 한 일이라고는 소설 비슷한 글을 쓰고, 그것을 안주로 여럿이서 돌아가며 비평보다는 비난하는 것 말고는 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런 발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렌즈를 빼지 않아 뻑뻑한 눈을 한 학회장은 몇 개의 이미지를 제시했고 우리는 간단한 투표 끝에 위의 이미지를 골랐다. 우리는 선정된 이미지를 통해 짤막한 글을 한 편 써 내는 것으로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나는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문득 그 이미지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내가 텔레비전으로 보던 연어와 위화감이 느껴지는 물고기였으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이 연어를 벽에 가두었을까. 궁금증을 도저히 이기지 못하고 나는 인터넷을 뒤졌다. 그 결과 알아낸 사실은, 위의 동상이 실제 미국 오리곤 주에 있는 연어 조각이고, 그 조각이 건물 2층에 위치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건물에는 해산물 레스토랑이 유명했다. 이미지를 보다보니 내가 잘못 판단했다고 느꼈다. 연어는 벽에 갇힌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목욕을 할 때 물에 갇혔다고 느끼지 않는 것처럼 저건 어쩌면 찰나를 포착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물고기의 생명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학술제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른 일이 있었다. 연어의 행방도 알 수 없었다. 연어에게도 다른 일이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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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_클로버
무색의 녹색 생각들이 맹렬하게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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