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던트 이블과 같은 좀비 아포칼립스를 제외하고 현대를 배경으로 한 FPS에서, 드디어 블록버스터형 스토리 외에 사람을 불안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작품이 나왔다. 갓 블레스 아메리카를 외치며 뛰어드는 기존 FPS들과 달리 이 게임은 하면 할수록 비참해진다. 게다가 의형제 같은 동료 NPC들은 끊임없이 플레이어를 비난한다. NPC를 넘어 심지어 플레이어 자신도 자신이 행한 마우스 클릭질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만들게 하니 이건 뭐 자괴감 제조기 수준.


상대는 모두 나쁜놈이었던 기존 FPS와 달리 여기서는 적이, 지금도 주인공과 같은 국가에서 봉사 중인 미군이다. 플레이어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들을 모두 쏴 죽여야 하며 임무 수행을 위해서는 백린탄을 사람에게 쏘기도 한다. 이럴 거면 차라리 피카레스크 소설로 만들어서 아예 주인공을 나쁜놈으로 설정하면 죄책감이 덜한데, 주인공도 플레이어랑 같이 괴로워하고 자신의 지난 행적에 대해 몸부림친다.


이건 모두 당신 잘못입니다.아니 니가 하라는 대로 했는데? 악의 평범성 고찰인가


플레이어에게 죄의식을 더하려는 듯이 스펙 옵스는 백린탄에 대한 묘사가 강렬하다. 실제로 백린탄은 사물이나 인체 둘다에게 치명적인 무기이다. 파편 등으로 적을 제압하는 포탄이나 탄환과 달리 백린탄은 높은 온도를 이용하므로 방어할 방법이 별로 없다. 피부에 백린이 닿아 물을 부으면 피해 면적이 늘어나니까 흙 같은 걸로 덮어 흙과 같이 긁어내든지 차고 있던 대검 등으로 피부를 박박 긁어야한다고... 요새 이스라엘 군이 민간인에게 쏘는 탄이 이것인데, 어찌나 강력한지 사람 뿐 아니라 차량이나 포도 녹을 정도다. 스펙 옵스를 구글링하면 백린탄에 대한 스크린샷이 많은데, 플레이어들이 다들 백린탄에 충격을 먹은 듯하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레이더를 보며 백린탄 포격 위치를 지정하는 모습은 왠지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UAV나 AC-130로 무덤덤하게 사람 잡는 일을 비꼰듯.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자기가 행한 일의 결과를 반드시 목도하게 된다.


대위님이 우릴 염병할 살인자로 만들었다구요!


단지 조금 아쉬운 것은 탄탄한 스토리에 분기점이 별로 없다는 것. 선택을 할 수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팀원들이 비난하는 길로 가게 되고 선택에 따른 스토리 변화가 별로 없다. 엔딩 부분은 조금 나뉘기는 하지만 그것도 이미 플레이어들이 우울한 환경에 지칠대로 지친 상태라서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게임성이 별로라는 의견이 있기도 한데, 내가 보기에 별로 흠잡을 구성은 아니다. 갑자기 엄폐물에서 튀어나가는 등 AI 멍청 돋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적을 지정해서 아군에게 지원사격을 요청하는 것은 사실 내가 쏘는 것만 못하긴 하지만 그 외에 FPS로서 부족한 점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콜 오브 듀티 시리즈에서 빙벽을 오르고 배틀필드에서 차량을 모니 이 게임이 빈약해 보일 수밖에...


제로 펑추에이션의 얏지도 2012년 최고의 게임으로 스펙 옵스를 꼽았는데, 게임성이 좋다는 것보다는 한 번쯤 플레이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기 때문. 나도 같은 생각이다. 나처럼 별 생각없이 살인 무기의 방아쇠를 당겼던 사람들에게 모두 추천한다. 적이 모두 악마일 때가 좋았지


아, 켜자마자 눈치챘겠지만 게임 시작화면 메뉴에서 흘러나오는 BGM은 지미 헨드릭스 버전의 〈Star Spangled Banner〉(미국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이다. \m/ 베트남 전쟁이 한참 활발할 당시 지미 헨드릭스가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미국 국가를 연주했는데, 음악이 그만의 사운드로 나름 평범하게 연주되나 싶더니 갑자기 폭격기가 폭탄을 쏟아내듯 빠른 속주로 금세 분위기를 반전시켰던 적이 있다. 전쟁광 미국에 대한 반전 음악인 셈이다. 게심 시작화면 메뉴도 미국 국기가 거꾸로 매달려 있어서 의미 심장한데다가 이 노래까지 흘러나오니 이건 뭐 대놓고 전쟁의 심각성을 보여주겠다고 작정한 셈. 게임이 진행될 수록 옥상 위 저격수가 어떻게 되어가는지도 볼만 하다.


WRITTEN BY
_클로버
무색의 녹색 생각들이 맹렬하게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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