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광화문, 덕수궁 부근 정동에서 옛날 모습을 재현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름은 정동야행. 저녁까지 행사가 계속되서 야행이라고 했겠지.


그런데 시작부터 비가 왔다.


기만청기상청 예보에 따르면 오후 4시까지 강수확률 50%였다. 행인들도 덕수궁 근처 포장마차나 카페 안으로 몸을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종합안내소에서 정동야행 관련 리플렛 등을 챙기자마자 일정을 수정하기 위해 정동 전망대로 급하게 움직였다.



정동야행 퀘스트 일람서인 스탬프 북. 랜드마크(문화공간)에는 스탬프 찍어주는 천막이 있다. 5곳 이상의 도장을 받아오면 지정된 곳에서 캘리그래피로 만든 기념증서를 받을 수 있다. 덕수궁 도장은 잘못 받았다(...) 저건 너무 정직하잖아.



정동 전망대에는 카페가 있었다. 그렇다고 뭔가를 사서 먹어야만 전망대 근처 의자에 앉을 수 있는 티켓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잠시 카메라를 정비하고 나서 다운 받아놓은 정동야행 리플렛 PDF을 노려보았다. 그렇다고 딱히 다른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 공공 와이파이가 되는 점이 다행이었다. 페이스북에 징징글을 올리고 나서야 여행 목적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왔다. 마음먹었던 목표를 정리하다보니 해결책이 나왔다. 서울 성공회 성당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꼭 들어야 하는데 그건 7시에 시작한다. 그럼 덕수궁 야간입장은 포기. 비가 오니까 실내에 있어야 하는데 마침 덕수궁에는 덕수궁 미술관이 있다. 야간입장을 포기하고 주간입장을 해서 미술관을 먼저 구경하면 되겠군.



서울시청 별관 13층에 위치한 정동 전망대 풍경. 왼쪽 위에 보이는 서구식 건물이 덕수궁 미술관이다. 카메라 화각이 좁아서 표현이 안 됐지만,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서울시청 앞 광장을 볼 수 있다.



푯값 1,000원을 지불하고 덕수궁 안을 구경했다. 비가 와서 카메라는 가방에 넣어 놓았기 때문에 사진을 찍지는 않았다. 조선 왕궁임에도 건물 내부 일부는 서구적으로 되어 있었다. 조선 임금이 자는 방을 재현해 놓았다면 역사 공부가 더 잘 될 텐데. 그냥 사기극에서 봐야겠다.



덕수궁 미술관 부근 연결통로. 대학교 1학년 때 동기들과 다 같이 놀러갔던 기억이 나서 찍었다.



덕수궁을 다 돌아다니고 나서야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덕수궁 미술관의 정식 명칭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다. 현재는 수묵추상화의 거장, 정탁영 작가의 기증특별전이 전시되고 있다. 미술관 1층에는 그가 수묵추상화를 그리기 위해 사용했던 도구와 더불어 수묵추상화 몇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추상이 수묵화에서도 일어난다는 일이 신기했는지 프랑스 관람객들도 한참이나 한지에 시선을 고정했다.

미술관 1층 다른 곳에서는 인체 드로잉과 인물 스케치 등이 전시되었다. 세밀한 관찰력이 돋보인다. 그림 속에는 모델들이 평소에는 절대 볼 수 없을 것 같은 포즈로 몸을 구부리고 있어서 잘 볼 수 없던 인체의 곡선이 눈에 띄었다. 한지에 붓을 대지 않고 오히려 찢어내어 발상의 전환을 한 작품도 기억에 남는다. 미니멀아트가 한지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게 재미있었다. 특히 한지는 여러 겹의 종이로 되어 있어 그 특색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다. 실내 촬영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사진 찍지 못한 게 아쉽다.


미술관을 나오니 비가 거의 그쳐있었다. 시계를 보니 2시였다. 나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고 그 빈자리를 우산으로 대체했다. 덕수궁을 나와 덕수궁 돌담길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각종 체험 전시가 벌어졌다.



드라마 《허준》에서 본 것처럼 약재를 싼 한약첩을 만들어보는 행사다. 진짜 한약첩 대신 크기를 좀 줄여 손바닥 크기 만한 향첩은 밖에 야광도료를 발라 밤에도 빛난다고 한다. 설마 포장지에 라듐을 바르는 건 아니겠지. 어린이들의 친구 길버트!




동상인 척하는 연기자들. 앞에서 계속 아줌마 개그를 치는데 프로답게 웃음을 꾹 참고 있다. 길다가 음식을 주우면? 푸드득!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입구. 유관순 열사가 공부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윤석남 전시회를 보고 나서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이동했다. 교실 하나가 예전 모습 그대로 유지되어 있는데다가 앉아볼 수도 있다.



1527년 최세진이 한글로 펴낸 한자 학습서인 《훈몽자회》. 16세기 한자 발음 및 한글 자음 발음을 유추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전시품은 등사본인데, 400년 전 자료로 공부했다는 게 신기하다. 그냥 참고용이겠지.



전시장을 둘러보다가 《훈몽자회》, 주시경 흉상 등 몇 가지 반가운 전시품을 발견했다. 국문과생이라면 알만한 사람인 헐버트의 사진도 찾아볼 수 있다. 참고로 헐버트 박사는 주시경의 선생으로서, 제자와 함께 한글 연구에 힘썼다. 독립신문 편집자이기도 했는데 민중이 쉽게 신문을 읽을 수 있도록 당시 신문의 주류 언어였던 한자 대신 한글과 띄어쓰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기도 했지.



이건 쓰레기 개인 연작.



돌아다니다 보니 도장을 슬슬 채워서 기념증서를 받기로 했다. 기념증서를 받을 수 있는 곳 중 하나인 구세군 박물관으로 목적지 변경.



신천지 교인 출입금지.



구세군 박물관의 크기는 작았지만 어려운 시절 사람들에게 봉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봉사를 지속하는 열정만큼은 보여준 것 같다. 박물관 앞에서는 구세군 냄비 미니어처를 종이로 만들어 볼 수 있는 행사도 열렸다.


구세군 박물관을 지나 덕수궁쪽으로 다시 돌아가는데 뭔가 사람이 아주 많았다. 가보니 그곳에는 미국 대사관저가 있었다.



놀이공원처럼 긴 줄을 기다려 겨우 정문을 구경할 수 있었다.



미국 대사가 먹고 자는 곳인데 왜 이렇게 줄이 기나 했더니 170년 만의 개방이라고. 그러나 내 생각에 긴 줄이 생긴 근본적인 이유는 보안 검색 때문이다.



테러 예방 차원에서 모든 입장객들을 입국 때처럼 철저히 조사했다.



나 같은 경우는 가방과 카메라를 따로 검사받고 몸만 금속탐지대를 통과했는데도 걸렸다. 주머니의 열쇠와 동전이 나를 위험분자로 만들었던 모양이다. 휴대용 금속탐지기까지 통과하고 나서야 입장이 허가되었다. 경찰뿐만 아니라 사복 경찰도 꽤나 많았는데 어차피 다들 펑퍼짐한 정장을 입은 데다 귀에 무전기 수신기를 달고 있어서 경찰로 못 보는 편이 더 이상할 정도였다.



응접실과 같은 바깥채를 지나 안쪽에 가 보니 있는 것은 정원과 안채.



한국식으로 꾸며져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물론 내부는 서양식으로 되어 있겠지만. 사람들이 많아 복잡해진 미 대사관저를 나오니 배고파져서 밥을 먹기로 결심했다. 아무거나 먹을 수도 있었지만 놀러온 만큼 여기서 유명하다는 걸 좀 먹어봐야지. 나는 유명하다는 순댓국집을 찾아갔다.



순순대탕은 머릿고기나 내장 없이 순수하게 순대만 들어있다.


가게 내부는 8인이상 단체 두 팀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좁지 않은 편. 나는 순순대탕과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그리 달지 않은 깍두기에 젓갈도 생각보다 짜지는 않았다.



생파와 고추가 차려져 왔는데 파는 생소했다. 보통 생양파를 주는 것 같은데 생파라니. 먹어보니 생각보다 맛있어서 종지를 비웠다.



양은 적당했다. 나한테는 조금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맛은 그냥 그럭저럭. 재방문 의사는 없음. 그러면서 국물까지 싹 비움.



여정의 종착지는 서울 성공회 성당. 영국인 A.딕슨의 설계에 따라 영국 성공회에서 지원하고 국내 신자들이 헌금을 모아 만들었는데 불완전한 모습으로 유지되다가 영국 렉싱턴 지역의 어느 박물관에서 설계도 원본이 발견됨에 따라 1996년부터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이젠 건물 구조가 완연한 십자가 모양이 되었다.



기왓무늬가 보이는 것처럼 한국 전통 양식과 서양 양식을 절충하여 만들었다. 정말 자연스럽게 콜라보.




대성당 내부. 나중에 여기서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 진행된다. 파이프 오르간은 정면에도 조그맣게 보이지만 그건 성가대용 작은 파이프 오르간이고 메인은 입구쪽 2층에 있다.


이것이 바로 메인 파이프. 천 개 정도의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다.



파이프 오르간 연주는 역시 성당에서 들어야 제맛.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는 건반 뿐 아니라 발도 놀려가며 온몸으로 연주를 해야 한다. 악보만 안다고 해서 곧장 연주를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파이프 구조를 미리 숙지해야 하기 때문에 연주하기가 쉽지 않다. 어떤 파이프 오르간은 전문 연주자가 따로 있을 정도. 참고로 파이프 오르간은 못해도 3억 이상(...)


연주 스케쥴은 파이프 오르간 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토카타와 푸가 라단조를 시작으로 영화 《미션》삽입곡 등 유명한 곡들로 이루어졌다. 30분 정도로 짧아서 그게 너무 아쉽다.


난 집이 멀어서 덕수궁 야간개장 같은 야행을 제대로 즐기지는 못했다. 그래도 정동 둘러보기는 성공.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구)신아일보 별관을 못 갔다. 경향신문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국내 최초의 상업신문이 언론탄압에 의해 강제로 폐간당했지. 현재 신안일보와는 이름만 같다. 언론통폐합 이후 실직한 기자들이 통폐합주를 마실 때 TV에서는 땡전뉴스만 흘러나왔다. 땡전뉴스는 지금 봐도 개콘보다 재밌다.


날씨가 꽤 더운 걸 보니 이제 슬슬 여름이다. 다음에는 시원한 걸 먹으러 나가야겠다.



도장을 모아 만든 기념증서. 꽃까지 부탁했는데 친절하게 그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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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클로버
무색의 녹색 생각들이 맹렬하게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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