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1] 블라드미르(별명은 '디디', 한명구 粉)가 멀리 내다보는 장면


《고도를 기다리며》는 주변에서 재미있다면서 강력하게 권했다. 후배가 기묘한 능력을 발휘해 표값을 절반 정도로 할인해 준 것도 연극을 보게된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산울림 소극장에 가기 전에 잠깐 살펴 본 줄거리는 간단했다. 말 그대로 두 사람이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줄거리의 전부. 학회 활동의 일환이라 홍대 산울림 소극장으로 다들 우르르 몰려가 자리에 앉았는데 극장에 남녀노소할 것 없이 사람들이 가득 차는 모습에 점점 기대치가 올랐다. 잠시 뒤 휴대전화 에티켓 안내 직후에 조명이 꺼졌다. 눈앞이 밝아진 다음부터 극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함께 고도를 기다렸다.



이 부조리 연극은 산울림 소극장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설립 당시부터 이 연극을 공연하면서 이제는 서로의 프랜차이즈가 됐다. 고도하면 산울림이고 산울림하면 고도인 것이다. 심지어 민음사가 번역본을 출간할 당시 극단 산울림의 대표이자 해당 연극 대본 담당인 서울대 불문과의 오증자 교수에게 감수를 요청할 정도였다.


해당 연극은 사무엘 베케트의 소설《고도를 기다리며》을 원작으로 한다. 사무엘 베케트는 이 소설로 1969년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다. 1969년은 한국일보 소극장 개관 기념으로 《고도를 기다리며》가 국내에서 처음 공연된 연도이기도 하다. 영문학과 학생들이라면 소설이나 희극 둘 중 하나는 경험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1952년 소설이 출판되고 1953년 파리에서 초연된 이후에도 논란이 많았다. 고도라는 인물, 심지어 서사의 의미마저 불친절했기 때문이다. 평론가들은 기립박수를 쳤지만 관객들은 어리둥절했다. 인물과 배경, 핵심소재까지 모두 상징적이고 추상적이었다. 웃으며 손뼉을 치던 관객들은 막이 내리자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혔다. 단순히 고도가 결국 오지 않았다는 결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림2] 미국에서 공연된《고도를 기다리며》(1988). 두 배우는 로빈 윌리엄스와 스티브 마틴.


극이 관객에게 말하는 것은 기다림 그 자체이다. 3시간 동안 나가지 않고 기다리면서 관객도 배우와 같이 기다림을 경험한다.


작가는 적극 부정했지만, 고도는 신이다. 양을 치고 하얀 수염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다. 아니, 캘리포니아의 어떤 교도소[각주:1] 죄수들이 말했던 것처럼 고도는 자유다. 고도가 오지 않는다면 목을 맨다는 주인공들의 말에서 떠올릴 수 있다. 사실 고도는 실존의 목적이다. 고도를 결코 만날 수 없거니와 찾으러 갈 수도 없으며 남과 대화하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기에 그렇다.


생각해 봤는데, 원작자는 비겁하고 치졸하다. 그는 "이 작품에서 신을 찾지 말라. 여기에서 철학이나 사상을 찾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 보는 동안 즐겁게 웃으면 그만이다."라고 했지만 "그러나 극장에서 실컷 웃고 난 뒤, 집에 돌아가서 심각하게 인생을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이다"라는 여지를 남기며 관객들을 괴롭혔다. 고도의 정체에 대해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며 손사래를 쳤던 원작자처럼 우리 모두는 고도는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연극이 끝났을 때 관객들은 고도가 무엇인지 스스로 정의할 수 있다.


원작자 베케트는 아일랜드 출신이라 중립국이었음에도 프랑스 친구들의 레지스탕스 활동을 도왔다. 게임 《사보추어》인가? 그러다 나치에 발각되어, 프랑스 남단 보클루즈 지역에 숨어 살게 된다. 참고로 보클루즈 지방은 작품 내에도 등장한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고 눈에 띄는 활동은 할 수 없으므로 그는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무료를 달랜다. 이때 이야깃거리는 금방 동이 나기에 쉴 새 없이 다른 화제를 찾는 아슬아슬한 대화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방식이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등장인물들이 행하는 대화 방식과 유사하다.


한편 연극의 등장인물들은 서로 아귀가 안 맞는 이야기를 쏟아 낸다. 미치광이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삶에서 대화하는 방식이다. 나 자신을 남에게 온전히 이해하게 할 수 있는 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런 와중에 삶을 압축하는 주옥 같은 대사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인간은 모두 낳을 때부터 정신이 돌았어. 어떤 인간들은 그대로 돌아서 살지."

"태어날 때부터 무덤에 걸터 앉게 되는 거요."

"나는 이런 짓을 계속할 수 없네.", "그것은 자네 생각이지."


메시지 가득한 대사가 들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조그만 탄성을 내질렀는데 덕분에 옆에서 같이 보던 사람에게 핀잔을 들었다. 그런데 정말 감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부조리극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인생을 삼사 십년 쯤 경험하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격언들이 중구난방으로 튀어나오니 좀이 좀 쑤셔야지. 



신나게 웃으며 또 한없이 감탄하다가 산울림 극장 문을 나선 다음에 깨달았다.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인식은 하고 있었다. 수많은 연애 영화의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멋져 보인다. 물론 목적의식도 없이 발끝 가는 대로 가는 삶이 천하거나 저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남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내일을 기다릴 이유를 가진다. 


한편, 기다리는 사람이 멋져 보일지는 몰라도 기다리는 사람의 내면은 불안이 가득하다. 어쩌면 절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러다 인내심이 바닥나면 목을 매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은 무척이나 괴로우며 지치는 일이 아닌 적이 없었다.


아, 참고로 게임 《역전재판 3》에 등장하는 검사 고도의 모티브가 이 연극에서 왔다고 한다. 어쩐지 이상한 소리를 해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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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포토]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거지?, 김세운 기자, 민중의소리, 2015.03.16.

그림2; Waiting for Godot, Robin Williams Fan site(http://www.robin-williams.net/godot.php), 2015.03.28.에 확인.

  1. 역사적으로 《고도를 기다리며》는 교도소에서 공연되는 단골 연극인데 그 이유는 등장인물 중 여자가 없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WRITTEN BY
_클로버
무색의 녹색 생각들이 맹렬하게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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